10월 22일 · 수의사 박근필

긴 글

분노 단계는 언제 끝나나요? — 슬픔은 「다섯 단계」대로 오지 않습니다,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과 단계에 대한 오해

「저는 아직 부정 단계인가 봐요.」
「화가 나는 걸 보니 분노 단계겠죠. 언제쯤 수용 단계가 올까요?」

슬픔을 겪는 분들이 자신의 마음을 「단계」로 재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한 번쯤 들어 보셨을 「슬픔의 다섯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단계는 처음부터 반려동물을 잃은 보호자를 두고 만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이 단계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연구는 무엇을 보여 줬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섯 단계는 어디서 왔을까요

다섯 단계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1969년에 펴낸 책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나왔습니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섯 단계는 「자기 죽음을 마주한 환자」의 마음을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가족이나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의 슬픔을 조사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퀴블러로스도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퀴블러로스는 2005년 데이비드 케슬러와 함께 쓴 책 『상실 수업(On Grief and Grieving)』에서 이 단계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다섯 단계는 정해진 순서대로 차례차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섯 단계를 다 겪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연구는 무엇을 보여 줬을까요

2007년 미국 의학 학술지 『JAMA』에 실린 예일대 연구가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을 시간에 따라 살펴본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서 처음부터 가장 많이 보고된 마음은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단계 이론대로라면 맨 마지막에 와야 할 마음이 처음부터 가장 컸던 셈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슬픔의 감정은 분노나 우울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습니다.

물론 이 연구도 반려동물이 아니라 사람과의 사별을 조사한 것입니다.
각 감정이 가장 커지는 시기는 단계 이론의 순서와 비슷했지만, 받아들임과 그리움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슬픔이 한 단계씩 차례대로 지나간다는 생각만으로는 실제 마음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017년에는 사별 연구자들이 학술지에 「다섯 단계로 슬픔을 설명하면 사별한 사람을 오히려 잘못 이끌 수 있다」는 경고를 실었습니다.
내 슬픔이 단계표와 다르면 「내가 잘못 슬퍼하고 있나」 하고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억해 두셨으면 하는 것

슬픔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습니다.
화가 났다가, 괜찮았다가, 다시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날 다음에 그리움이 더 크게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몇 단계인지 맞히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픔과 일상을 오가는 마음에 대해서는 지난 글 「울다가 웃는 나, 이상한 걸까요?」에서 「이중 과정 모델」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단계보다 살펴볼 것

단계를 세는 것보다 지금의 생활을 살펴보시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잠은 잘 수 있는지, 밥은 먹을 수 있는지, 해야 할 일을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는지.

몇 주가 지나도 이런 일상이 많이 무너져 있다면 혼자 견디지 마세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뒤 겪는 깊은 슬픔과 우울을 흔히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럴 때는 상담 전화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마음이 많이 힘드실 때는 상담 전화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의전화복지재단 상담센터 1566-2525(펫로스 상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24시간)에 전화하실 수 있습니다.

단계표 대신, 오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 두셔도 좋습니다.
떠난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펫러스(PETLUS) 쉼터에 이름 없이 편지로 남기실 수 있습니다.

혼자 견디기 어려우시면 펫로스 치유 글쓰기(펫러스) 안내를 읽어 보시거나, 이름 없이 편지를 남기는 펫러스 쉼터에 들러 주세요.

이 글은 상담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많이 힘드실 때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24시간)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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