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 수의사 박근필
긴 글
말로는 안 나오는 말을 글로 쓰면 어떻게 될까요? —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 속 글쓰기
아이를 떠나보낸 뒤 가족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혼자 있을 때 아이 이름을 적어 보고 눈물이 났다는 분이 계십니다.
가족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도, 혼자 있을 때 우는 것도 슬픔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은 글쓰기가 슬픔 앞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연구가 보여 준 것과 보여 주지 못한 것을 나누어 적고, 마지막에 시작하는 방법을 안내해 드립니다.
글쓰기 연구는 처음에 무엇을 보여 주었나요?
1986년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와 샌드라 비일이 학술지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입니다.
미국 대학생 46명을 무작위로 나누어, 나흘 연속으로 저녁마다 15분씩 글을 쓰게 했습니다.
한 조건에서는 사소한 주제를 쓰게 했고, 나머지 조건에서는 살면서 겪은 힘든 일을 쓰게 했습니다.
논문 초록에 따르면, 힘든 일의 사실과 감정을 함께 쓴 경우에는 글을 쓴 직후 혈압이 상대적으로 높고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6개월 동안 학교 건강센터를 찾은 횟수는 더 적었습니다.
논문은 이 결과가 예비적인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또 대상이 미국 대학생이었고, 반려동물을 잃은 보호자를 다룬 연구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결과가 우리나라 보호자분께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쓰면 슬픔이 줄어든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2006년 학술지 『Psychological Bulletin』에 실린 분석은 이런 글쓰기 연구 가운데 무작위 배정 연구 146편을 모아 살폈습니다.
평균 효과 크기(r)는 0.075였고, 분석한 연구자는 효과가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다만 숫자로 보면 크지 않은 효과입니다.
이 분석은 여러 주제의 글쓰기 연구를 합친 것이며, 반려동물 상실만 따로 본 것이 아닙니다.
사별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있습니다.
2002년 학술지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에 네덜란드 연구진이 발표한 연구입니다.
최근 사별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나누어 페니베이커 방식의 글쓰기를 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사별 직후에도, 6개월 뒤에도 글쓰기가 고통이나 병원 방문을 줄였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 역시 사람의 사별을 다룬 연구입니다.
정리하면, 글쓰기가 슬픔을 낫게 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도움이 되었다고 느끼는 분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나요?
그렇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의 표정과 반응이 신경 쓰이는데, 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은 쓰다가 멈춰도 되고, 지우고 다시 써도 됩니다.
떠난 아이에게 직접 말을 거는 형식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네가 좋아하던 간식, 아직 서랍에 있어.」 같은 문장은 사람에게는 하기 어려워도 아이에게 쓰는 글에는 적을 수 있습니다.
이 이유들은 연구로 확인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오늘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요?
잘 쓰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첫 줄은 아이 이름으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은 오늘 있었던 일, 아이가 있었다면 했을 말, 미처 하지 못한 말, 고마웠던 순간 가운데 아무거나 적으시면 됩니다.
세 줄이어도 편지입니다.
쓰는 동안 더 슬퍼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본 연구에서도 쓴 직후에는 기분이 가라앉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힘들어지면 멈추셔도 되고, 쓰고 싶은 날에만 쓰셔도 됩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 보시는 분도 계십니다.
혼자 쓰기가 막막하시다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펫러스(PETLUS) 쉼터를 열어 두었습니다.
다른 보호자분들의 편지를 읽기만 하셔도 됩니다.
글쓰기는 상담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뒤 겪는 깊은 슬픔과 우울, 흔히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마음이 오래 이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함께 받으시길 권합니다.
마음이 많이 힘드실 때는 사랑의전화복지재단 상담센터 1566-2525(펫로스 상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24시간)에 전화하실 수 있습니다.
혼자 견디기 어려우시면 펫로스 치유 글쓰기(펫러스) 안내를 읽어 보시거나, 이름 없이 편지를 남기는 펫러스 쉼터에 들러 주세요.
이 글은 상담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많이 힘드실 때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24시간)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관련 글 — 긴 글
- 아이의 마지막을 정할 때 마음이 갈라지는 건 이상한 일일까요? — 보호자 143명의 응답
- 왜 이름 없이 쓰는 쉼터를 열었을까요? — 펫러스(PETLUS) 쉼터가 지키는 약속
- 잊어야 괜찮아지는 걸까요? —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과 「계속되는 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