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 수의사 박근필
긴 글
슬픔에는 순서가 있을까요? — 슬픔의 다섯 단계와 이중 과정 모형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슬픔의 다섯 단계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을 다루는 글에서도 이 다섯 단계가 자주 인용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떠나보낸 보호자분 가운데는 「저는 왜 아직 수용 단계가 안 오죠?」 하고 물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 단계가 어디서 왔는지, 슬픔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말씀드립니다.
다섯 단계는 원래 무엇을 설명한 것인가요?
이 모형은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1969년에 낸 책 『죽음과 죽어감』(원제 On Death and Dying)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 책입니다.
남겨진 사람의 슬픔을 설명하려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단계를 사별에 적용해 설명한 책이 2005년에 나온 『On Grief and Grieving』입니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David Kessler)가 함께 썼습니다.
케슬러는 이 단계가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섯 단계를 다 겪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몇 단계인가」를 따지며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픔은 어떻게 움직이나요?
스트뢰베(Stroebe,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와 슈트(Schut)는 1999년에 학술지 『Death Studies』에 「이중 과정 모형(dual process model)」을 발표했습니다.
논문 초록에 따르면, 이 모형은 사별한 사람이 겪는 스트레스를 상실을 마주하는 쪽(상실 지향)과 달라진 생활을 꾸려 가는 쪽(회복 지향)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이 때로는 이를 마주하고 때로는 피하면서 두 쪽을 오가는 것을 적응 과정의 하나로 봅니다.
슬픔을 다루다가 잠시 쉬는 시간도 적응에 필요하다고 이 논문은 주장합니다.
다만 이 모형은 사별 일반을 다룬 이론이며, 반려동물 사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 사진을 보며 우는 날이 있고, 일에 집중하며 아이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날이 있습니다.
둘 다 슬픔을 다루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잠시 내려놓았다고 해서 아이를 잊은 것이 아니고, 다시 울었다고 해서 뒷걸음질한 것도 아닙니다.
제 진료 경험으로는 이 설명이 다섯 단계보다 보호자분들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다 지나갔다고 생각한 날에 다시 울어도 되나요?
떠나보낸 지 1년이 지나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동물병원 앞을 지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아이가 좋아하던 간식 광고, 비슷한 털색의 아이, 처음 데려온 계절의 냄새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뒷걸음질이 아니라, 흔히 있는 반응입니다.
그만큼 아이가 마음에 남아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왜 아직도 이러지」 대신 「오늘은 네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셔도 좋습니다.
울고 난 다음 날 평소처럼 지내는 자신을 보고 놀라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또한 슬픔에서 흔한 모습입니다.
어떤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요?
슬픔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지만, 혼자 감당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 식사, 일이 오랫동안 무너져 있거나 스스로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몇 달이 지났는지와 상관없이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전문가의 도움과 함께, 이름 없이 마음을 적어 둘 수 있는 펫러스(PETLUS) 쉼터도 소개해 드립니다.
쉼터는 전문 상담을 대신하는 곳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상담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뒤 겪는 깊은 슬픔과 우울, 흔히 펫로스 증후군(펫로스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마음이 오래 이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함께 받으시길 권합니다.
마음이 많이 힘드실 때는 사랑의전화복지재단 상담센터 1566-2525(펫로스 상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 정신건강위기상담 1577-0199(24시간)에 전화하실 수 있습니다.
보호자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에 답한 책 — 『할퀴고 물려도 나는 수의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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